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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PS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운 어려운 시스템입니다. 기본적인 개념은 매우 단순합니다. 캐릭터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CP로 일원화되어 있으므로 정해진 CP에 맞춰 장단점과 기능을 선택하면 그대로 캐릭터가 만들어집니다. 판정도 단순합니다. 가장 흔하게 하는 성공 판정은 3d6을 굴려 목표치 아래로 나오는지만 확인하면 되고, 그밖엔 피해 판정과 반응 판정 정도가 있지만 이 역시 복잡해서 못해먹겠다 말할 수준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GURPS를 시작하는 일이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GURPS 기본 지향이 '직접 만들기'라는 것입니다. GURPS는 캠페인의 구성요소, 특히 캐릭터를 약간의 옵션이 있는 완제품의 형태보다는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갖가지 도구와 부품의 형태로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그러기 위해 GURPS가 제공하는 구성요소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렸지만 사실 목적은 같습니다. 범용 시스템으로서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인 셈이죠. 이는 GURPS의 주요한 장점이지만, GURPS에 처음 적응할 때 어려움을 겪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취사선택한다는 것이 얼른 보기에 막막할 수 있죠.
물론 한꺼번에 그 모든 것을 다 활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GURPS의 많은 부분은 옵션이고, 캐릭터 하나를 제작하고 캠페인 하나를 운영하기 위해 모든 요소를 다 포함시켜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캐릭터를 완성하고 캠페인에 적용시킬 규칙을 확정하고 나면, 다시 말해 캠페인에 도입할 요소를 결정하고 나면 그 이후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그렇지만 배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전반적인 감을 잡을 필요도 있습니다. 사실 시간이 답입니다. 느긋하게 룰북을 읽으며 만들어가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죠. 또한 그것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정 뭣하면 GURPS 경량판을 사용해 잠시 선택폭을 제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캠페인의 성격과 거기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명확하고 한정적이라면, 예상 문제와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요점을 대신 정리해줄 신뢰할 만한 족집게 과외교사가 있다면 편하지 않을까요? 꼭 초보자가 아니라도, 캠페인의 내용물과 캐릭터를 직접 고안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공을 덜어주고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해주는 지침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과목은? 던전 판타지입니다.
GURPS Dungeon Fantasy(이하 DF)는 D&D 이래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판타지 던전물을 GURPS로 플레이하기 위한 안내서 시리즈입니다. 각기 30여 쪽 내지 40여 쪽 정도의 pdf로 발매되었으며, e23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Dungeon Fantasy 1: Adventurers, Dungeon Fantasy 2: Dungeons, Dungeon Fantasy 3: The Next Level이 나와있고, 계속해서 추가 책자가 발매될 예정입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워낙에 이런 류의 서플리먼트는 만들자면 한정이 없는 면이 있기 때문에 시리즈의 끝도 예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자는 흔히 Dr. Kromm으로 불리는 SJG의 주요 필자 Sean Punch입니다. GURPS의 룰 메카닉에 있어서는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라고 말해도 별 무리는 없겠지요. (단, 앞으로는 Dr. Kromm 외의 다른 작가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DF 시리즈는 시험에 나오는 과목만 공부하는 기출 문제 해답집입니다. 여타 GURPS 장르북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죠. 판타지라고 하면, 아니 소위 '고전적인 서양 중세 판타지'라고 해도 상당히 폭이 넓고, 그 내용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는 장르이지만, 던전 판타지는 상대적으로 매우 전형적이고 단순한 개념입니다. 던전 크롤링, 핵 앤 슬래시,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까고 부수고 노략질하는 거죠. 뻔히 무엇을 하게 될지 알고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라면 GURPS의 범용성은 잠시 접어두고 목적에 딱 맞는 방식으로 맞춤 설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죠. GURPS DF 시리즈는 그런 책입니다. 초보자에게는 길잡이가 될 수 있고, 경험자에게도 숙고를 덜어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죠. 대체로 DF는 GURPS로 던전 판타지를 플레이하기 위한 제반 요소에 대해 대신 검토하고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며 구체적인 내용물까지 제공합니다. 쉽고 빠른 길이죠.
GURPS의 특징으로 사실성을 꼽기도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입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을 그대로 도입하지 않는 한, 완전한 사실성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캠페인의 개연성 문제까지 더하자면 꽤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성과 개연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수퍼 마리오는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게임이지만 재미있는 게임이죠. 단지 GURPS는 비교적 사실적인 방식으로 룰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장르의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기에 수월할 뿐입니다. 던전 판타지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사실성과 개연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매우 낮습니다. DF 시리즈는 GURPS가 사실성을 포기하고 장르의 요구에 따를 때 어떤 모습을 띨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실, 저자인 Dr. Kromm조차 책 전반에 걸쳐 이런저런 농담조의 언급을 하곤 합니다. 그 자신이 던전 판타지를 즐기는 팬인 만큼 던전 판타지의 난센스도 알고 있는 거죠.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 난센스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친구들이 모여 B급 액션 영화 하나를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그 영화의 어이없음에 킬킬거리다가도 멋진 액션 장면이 나오면 유쾌한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런 영화가 재미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영화에 대해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내용에 대해 지나치게 심각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죠. DF는 던전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대략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DF 시리즈는 캠페인에 필요한 만큼의 사실성과 개연성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던전을 다루는 장을 시작하면서 던전 판타지의 핵심 요소인 던전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애초에 "던전이 꼭 말이 될 필요는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선언하고 있죠. 때로는 말이 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표면적으로 너무 기가 막힐 노릇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겠지요.
사실성이 빠져나간 곳은 던전 판타지의 관습, 즉 파워 게이밍이 대체합니다. 역할 배분에 따른 전술적 전투, 전투 자원 관리, 물질적 보상 및 캐릭터 성장에 따른 전투 능력 강화를 주된 재미로 삼는 것은 던전 판타지의 빛나는 전통입니다. DF 시리즈의 캐릭터들은 던전 판타지의 전통적 역할과 이미지에 따라 구성된 캐릭터 템플릿을 기반으로 하며, 그 캐릭터 템플릿들 각각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주문 목록과 특수 능력과 장비와 성장 옵션이 제공됩니다. DF에서의 캐릭터 템플릿은 단지 캐릭터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도구일 뿐아니라 던전 판타지의 전통을 구현하기 위한 뼈대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요소들이 파워 게이밍을 지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캐릭터 템플릿들은 여러 사회적 맥락이나 배경을 감안하여 다양하고 다층적인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주어진 (전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던전 판타지가 추구하는 맛과 멋을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DF 시리즈의 또 다른 특징은 편의성과 단순성입니다. 던전 판타지 캠페인이 요구하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던전 판타지는, 희한하게 초인적이면서 전문 분야가 다 다른 모험가들이 웬일인지 뭉쳐서 어떤 이유로든 모처의 던전을 찾아들어가서 함정과 장애물과 괴물들을 돌파하고 어마어마한 보물을 챙겨와서는 팔아서 나눠먹는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때로는 사회적 관계나 도시 활극이나 야외 활동이 좀 덧붙여질 수도 있겠지만, 대략 그게 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험자와 던전과 함정과 장애물과 괴물과 보물 및 그와 관련된 각종 문제 해결 방법을 제공하면 그뿐인 거죠. GURPS는 그런 것들을 직접 구성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그것 자체도 재미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원하는 캠페인에 꼭 알맞는 내용물을 만들 수도 있지만, 공이 드는 일입니다. DF는 그 모범 답안을 제시해줍니다. 구체적인 내용물들이 수록되어 있죠. 직접 만들지 않고 그냥 그걸 써도 되고, 거기에 적절한 양념만 첨가해도 되고, 그냥 참고로만 삼아도 됩니다.
나아가 DF는 캠페인을 준비하고 운영하기 위해 참조해야 할 대상을 최소한으로 줄여줍니다. DF는 기본세트 외에도 GURPS Fantasy, Magic, Powers, Martial Arts 등에서 제시되었던 재료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단순히 참조 대상을 지시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던전 판타지에 적합한 형태로 가공한 결과물의 형태로 제공합니다. 또 그런 식의 가공이 필요치 않은 것은 그냥 필요한 부분만 잘라옵니다. 심지어 기본세트에 나와 있는 설명이라도, 빠른 참조가 필요하다 싶은 경우에는 그 설명을 주석으로 간략히 달아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DF는 사실상 다른 보조자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직접 참조하지 않고도 던전 판타지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Magic입니다. 하드커버 책 한 권에 실려 있는 주문들을 몽땅 가져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또 DF 시리즈는 던전 판타지는 복잡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만일 GURPS의 어떤 규칙이 사실성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상대적으로 복잡해 보인다면, DF는 던전 판타지의 재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혹은 던전 판타지다운 재미를 더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더 단순한 방식을 제시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GURPS 기본세트에 나오는 추락에 의한 피해를 따지기 위한 공식은 무게와 중력 가속도를 기반으로 한 것인 만큼 보다 사실적이지만 계산이 좀 필요하죠. DF는 그냥 거리에 따라 일률적인 추락 피해 표를 제공합니다. 좀 부정확하면 어떠냐는 겁니다. 또 하프의 현을 활시위로 이용할 수 있는 Bard/Scout용 활은 어떻습니까? 황당하지만 재미는 있을 법합니다. DF 시리즈는 그런 식입니다.
DF 시리즈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던전 판타지라는 특수한 관습과 맥락에 한정된 것들입니다. 이 시리즈가 다른 장르의 캠페인을 진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주의 요망'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 것입니다. 제품은 원래 용도에 맞춰 사용하는 게 가장 안전하겠죠. DF 시리즈의 특성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고요. 예를 들어 수중 전투를 할 때 전투 기능의 실력은 DX 기반 수영 실력까지로 제한한다는 방침은 다른 캠페인에 적용해도 적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큰 페널티를 감수하면 응급 처치를 1초 안에도 끝낼 수 있다는 규칙 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권장하기는 좀 무리겠죠.
전체적으로 DF 시리즈는 그 장르만큼이나 책 자체도 과격하고 단호합니다. 섬세, 복잡, 유연 같은 단어는 DF 시리즈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는 이미 던전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한 관점이 반영된 결과이겠죠. 그럼에도 수치적인 균형이나 룰의 정합성에 있어서는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격하고 단호하다고 해서 고민 없이 아무렇게나 쓴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최종적으로는 비사실적이고 단순하지만 그것이 GURPS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한 방향으로 최대한 발휘한 과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GURPS가 이렇게도 가는구나, GUPRS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재미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목적이야 어떻든 DF 시리즈는 가벼운 읽을 거리로 삼기에 적당합니다. 사실 큰 부담이 없거든요. 분량도 적고, 가격도 싸고, 내용도 까다롭지 않죠. GURPS 룰 전문가의 손으로 구현된 GURPS판 던전 판타지를 즐겨 보고 싶은 사람은 물론, 딱히 장르 팬이 아닌 사람이라도 그냥 재미삼아 보기에는 별 손색이 없습니다. 물론 이쪽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손댈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도 하겠지요.
GURPS Dungeon Fantasy 시리즈에 대한 소개는 이상입니다. 끝이 예정되지 않은 시리즈에 겨우 3권이 나왔을 뿐이라 섣부른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인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각 권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그럼에도 GURPS를 시작하는 일이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GURPS 기본 지향이 '직접 만들기'라는 것입니다. GURPS는 캠페인의 구성요소, 특히 캐릭터를 약간의 옵션이 있는 완제품의 형태보다는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갖가지 도구와 부품의 형태로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그러기 위해 GURPS가 제공하는 구성요소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렸지만 사실 목적은 같습니다. 범용 시스템으로서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인 셈이죠. 이는 GURPS의 주요한 장점이지만, GURPS에 처음 적응할 때 어려움을 겪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취사선택한다는 것이 얼른 보기에 막막할 수 있죠.
물론 한꺼번에 그 모든 것을 다 활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GURPS의 많은 부분은 옵션이고, 캐릭터 하나를 제작하고 캠페인 하나를 운영하기 위해 모든 요소를 다 포함시켜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캐릭터를 완성하고 캠페인에 적용시킬 규칙을 확정하고 나면, 다시 말해 캠페인에 도입할 요소를 결정하고 나면 그 이후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그렇지만 배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전반적인 감을 잡을 필요도 있습니다. 사실 시간이 답입니다. 느긋하게 룰북을 읽으며 만들어가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죠. 또한 그것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정 뭣하면 GURPS 경량판을 사용해 잠시 선택폭을 제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캠페인의 성격과 거기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명확하고 한정적이라면, 예상 문제와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요점을 대신 정리해줄 신뢰할 만한 족집게 과외교사가 있다면 편하지 않을까요? 꼭 초보자가 아니라도, 캠페인의 내용물과 캐릭터를 직접 고안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공을 덜어주고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해주는 지침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과목은? 던전 판타지입니다.
GURPS Dungeon Fantasy(이하 DF)는 D&D 이래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판타지 던전물을 GURPS로 플레이하기 위한 안내서 시리즈입니다. 각기 30여 쪽 내지 40여 쪽 정도의 pdf로 발매되었으며, e23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Dungeon Fantasy 1: Adventurers, Dungeon Fantasy 2: Dungeons, Dungeon Fantasy 3: The Next Level이 나와있고, 계속해서 추가 책자가 발매될 예정입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워낙에 이런 류의 서플리먼트는 만들자면 한정이 없는 면이 있기 때문에 시리즈의 끝도 예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자는 흔히 Dr. Kromm으로 불리는 SJG의 주요 필자 Sean Punch입니다. GURPS의 룰 메카닉에 있어서는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라고 말해도 별 무리는 없겠지요. (단, 앞으로는 Dr. Kromm 외의 다른 작가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DF 시리즈는 시험에 나오는 과목만 공부하는 기출 문제 해답집입니다. 여타 GURPS 장르북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죠. 판타지라고 하면, 아니 소위 '고전적인 서양 중세 판타지'라고 해도 상당히 폭이 넓고, 그 내용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는 장르이지만, 던전 판타지는 상대적으로 매우 전형적이고 단순한 개념입니다. 던전 크롤링, 핵 앤 슬래시,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까고 부수고 노략질하는 거죠. 뻔히 무엇을 하게 될지 알고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라면 GURPS의 범용성은 잠시 접어두고 목적에 딱 맞는 방식으로 맞춤 설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죠. GURPS DF 시리즈는 그런 책입니다. 초보자에게는 길잡이가 될 수 있고, 경험자에게도 숙고를 덜어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죠. 대체로 DF는 GURPS로 던전 판타지를 플레이하기 위한 제반 요소에 대해 대신 검토하고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며 구체적인 내용물까지 제공합니다. 쉽고 빠른 길이죠.
GURPS의 특징으로 사실성을 꼽기도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입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을 그대로 도입하지 않는 한, 완전한 사실성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캠페인의 개연성 문제까지 더하자면 꽤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성과 개연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수퍼 마리오는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게임이지만 재미있는 게임이죠. 단지 GURPS는 비교적 사실적인 방식으로 룰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장르의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기에 수월할 뿐입니다. 던전 판타지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사실성과 개연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매우 낮습니다. DF 시리즈는 GURPS가 사실성을 포기하고 장르의 요구에 따를 때 어떤 모습을 띨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실, 저자인 Dr. Kromm조차 책 전반에 걸쳐 이런저런 농담조의 언급을 하곤 합니다. 그 자신이 던전 판타지를 즐기는 팬인 만큼 던전 판타지의 난센스도 알고 있는 거죠.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 난센스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친구들이 모여 B급 액션 영화 하나를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그 영화의 어이없음에 킬킬거리다가도 멋진 액션 장면이 나오면 유쾌한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런 영화가 재미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영화에 대해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내용에 대해 지나치게 심각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죠. DF는 던전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대략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DF 시리즈는 캠페인에 필요한 만큼의 사실성과 개연성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던전을 다루는 장을 시작하면서 던전 판타지의 핵심 요소인 던전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애초에 "던전이 꼭 말이 될 필요는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선언하고 있죠. 때로는 말이 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표면적으로 너무 기가 막힐 노릇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겠지요.
사실성이 빠져나간 곳은 던전 판타지의 관습, 즉 파워 게이밍이 대체합니다. 역할 배분에 따른 전술적 전투, 전투 자원 관리, 물질적 보상 및 캐릭터 성장에 따른 전투 능력 강화를 주된 재미로 삼는 것은 던전 판타지의 빛나는 전통입니다. DF 시리즈의 캐릭터들은 던전 판타지의 전통적 역할과 이미지에 따라 구성된 캐릭터 템플릿을 기반으로 하며, 그 캐릭터 템플릿들 각각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주문 목록과 특수 능력과 장비와 성장 옵션이 제공됩니다. DF에서의 캐릭터 템플릿은 단지 캐릭터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도구일 뿐아니라 던전 판타지의 전통을 구현하기 위한 뼈대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요소들이 파워 게이밍을 지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캐릭터 템플릿들은 여러 사회적 맥락이나 배경을 감안하여 다양하고 다층적인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주어진 (전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던전 판타지가 추구하는 맛과 멋을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DF 시리즈의 또 다른 특징은 편의성과 단순성입니다. 던전 판타지 캠페인이 요구하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던전 판타지는, 희한하게 초인적이면서 전문 분야가 다 다른 모험가들이 웬일인지 뭉쳐서 어떤 이유로든 모처의 던전을 찾아들어가서 함정과 장애물과 괴물들을 돌파하고 어마어마한 보물을 챙겨와서는 팔아서 나눠먹는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때로는 사회적 관계나 도시 활극이나 야외 활동이 좀 덧붙여질 수도 있겠지만, 대략 그게 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험자와 던전과 함정과 장애물과 괴물과 보물 및 그와 관련된 각종 문제 해결 방법을 제공하면 그뿐인 거죠. GURPS는 그런 것들을 직접 구성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그것 자체도 재미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원하는 캠페인에 꼭 알맞는 내용물을 만들 수도 있지만, 공이 드는 일입니다. DF는 그 모범 답안을 제시해줍니다. 구체적인 내용물들이 수록되어 있죠. 직접 만들지 않고 그냥 그걸 써도 되고, 거기에 적절한 양념만 첨가해도 되고, 그냥 참고로만 삼아도 됩니다.
나아가 DF는 캠페인을 준비하고 운영하기 위해 참조해야 할 대상을 최소한으로 줄여줍니다. DF는 기본세트 외에도 GURPS Fantasy, Magic, Powers, Martial Arts 등에서 제시되었던 재료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단순히 참조 대상을 지시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던전 판타지에 적합한 형태로 가공한 결과물의 형태로 제공합니다. 또 그런 식의 가공이 필요치 않은 것은 그냥 필요한 부분만 잘라옵니다. 심지어 기본세트에 나와 있는 설명이라도, 빠른 참조가 필요하다 싶은 경우에는 그 설명을 주석으로 간략히 달아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DF는 사실상 다른 보조자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직접 참조하지 않고도 던전 판타지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Magic입니다. 하드커버 책 한 권에 실려 있는 주문들을 몽땅 가져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또 DF 시리즈는 던전 판타지는 복잡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만일 GURPS의 어떤 규칙이 사실성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상대적으로 복잡해 보인다면, DF는 던전 판타지의 재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혹은 던전 판타지다운 재미를 더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더 단순한 방식을 제시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GURPS 기본세트에 나오는 추락에 의한 피해를 따지기 위한 공식은 무게와 중력 가속도를 기반으로 한 것인 만큼 보다 사실적이지만 계산이 좀 필요하죠. DF는 그냥 거리에 따라 일률적인 추락 피해 표를 제공합니다. 좀 부정확하면 어떠냐는 겁니다. 또 하프의 현을 활시위로 이용할 수 있는 Bard/Scout용 활은 어떻습니까? 황당하지만 재미는 있을 법합니다. DF 시리즈는 그런 식입니다.
DF 시리즈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던전 판타지라는 특수한 관습과 맥락에 한정된 것들입니다. 이 시리즈가 다른 장르의 캠페인을 진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주의 요망'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 것입니다. 제품은 원래 용도에 맞춰 사용하는 게 가장 안전하겠죠. DF 시리즈의 특성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고요. 예를 들어 수중 전투를 할 때 전투 기능의 실력은 DX 기반 수영 실력까지로 제한한다는 방침은 다른 캠페인에 적용해도 적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큰 페널티를 감수하면 응급 처치를 1초 안에도 끝낼 수 있다는 규칙 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권장하기는 좀 무리겠죠.
전체적으로 DF 시리즈는 그 장르만큼이나 책 자체도 과격하고 단호합니다. 섬세, 복잡, 유연 같은 단어는 DF 시리즈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는 이미 던전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한 관점이 반영된 결과이겠죠. 그럼에도 수치적인 균형이나 룰의 정합성에 있어서는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격하고 단호하다고 해서 고민 없이 아무렇게나 쓴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최종적으로는 비사실적이고 단순하지만 그것이 GURPS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한 방향으로 최대한 발휘한 과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GURPS가 이렇게도 가는구나, GUPRS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재미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목적이야 어떻든 DF 시리즈는 가벼운 읽을 거리로 삼기에 적당합니다. 사실 큰 부담이 없거든요. 분량도 적고, 가격도 싸고, 내용도 까다롭지 않죠. GURPS 룰 전문가의 손으로 구현된 GURPS판 던전 판타지를 즐겨 보고 싶은 사람은 물론, 딱히 장르 팬이 아닌 사람이라도 그냥 재미삼아 보기에는 별 손색이 없습니다. 물론 이쪽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손댈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도 하겠지요.
GURPS Dungeon Fantasy 시리즈에 대한 소개는 이상입니다. 끝이 예정되지 않은 시리즈에 겨우 3권이 나왔을 뿐이라 섣부른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인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각 권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2008.02.25 10:16:18 (*.229.116.6)
뭐랄까... 물론 개인적으로는 해당장르에 관심이 많지만, 관심이 없더라도 그 겁스룰을 '과격하게' 바꾸는 패턴을 보고 응용할 수 있을 듯하네요. 전부터 겁스룰의 관습적인 용례 이외에도 응용폭을 넓히는 것에 관해서 좀 연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2008.03.17 00:09:04 (*.151.222.65)
김성일님 답변 보고 뿜었습니다!!
크하하,
여태까지 생각하던게 옳았던것 같아요!
묻 사람들이 겁스의 범용성은 다른 룰의 특수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라는 말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는데
사실 당연한 거였던 겁니다~!
크하하,
여태까지 생각하던게 옳았던것 같아요!
묻 사람들이 겁스의 범용성은 다른 룰의 특수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라는 말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는데
사실 당연한 거였던 겁니다~!
2008.03.19 21:29:27 (*.55.70.67)
대개 "범용성이 특수성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은 좀 파고 들어서 물어 보면 "겁스로 D&D 못한다"는 정도의 얘기입니다. 그건 당연하죠. 겁스로 하는 던전크롤도 D&D로 흉내 못내기는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면 겁스로 하는 던전크롤과 D&D로 하는 던전크롤 중에 어떤 게 더 우수한가로 가는데, 거기서는 더 이상 얘기가 안 됩니다.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대개 자기 취향에 맞는다는 주관적인 사실을 객관적 우수성이라고 착각하거든요.
특히나 D&D 같이 만들어진지 오래되고 기반이 확실한 시스템의 경우는 순전히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구조가 D&D라는 시스템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그 구조를 충실히 재현하지 못하는 룰은 빈약하다고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설령 아무리 허접하게 만든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표현하는 구조를 표현하는 능력은 *그 정의상* 세계 제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준을 거기에 맞추면 다른 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하게 되지요. 그것이야말로 객관적일 수 없는 취향의 문제인데도요.
물론 시스템의 우열을 가르는 객관적인 기준은 여러 가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자료의 분량을 따지면 범용 시스템은 한우물을 깊이 파는 것보다 여러 분야를 다뤄줘야 하기 때문에 특화된 시스템이 더 많을 수 밖에 없지요(여기에 대해서 범용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른 시스템의 자료도 얼마든지 변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 것입니다). 하지만 "범용성이 특수성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이런 기준들에 근거한 것이 아닌, 그저 무책임한 추측에 지나지 않더군요. 실제로도 보면 GURPS WoD가 원판보다 낫다는 평가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의 스토리텔러 시스템은 참 많이 우울했거든요...
특히나 D&D 같이 만들어진지 오래되고 기반이 확실한 시스템의 경우는 순전히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구조가 D&D라는 시스템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그 구조를 충실히 재현하지 못하는 룰은 빈약하다고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설령 아무리 허접하게 만든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표현하는 구조를 표현하는 능력은 *그 정의상* 세계 제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준을 거기에 맞추면 다른 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하게 되지요. 그것이야말로 객관적일 수 없는 취향의 문제인데도요.
물론 시스템의 우열을 가르는 객관적인 기준은 여러 가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자료의 분량을 따지면 범용 시스템은 한우물을 깊이 파는 것보다 여러 분야를 다뤄줘야 하기 때문에 특화된 시스템이 더 많을 수 밖에 없지요(여기에 대해서 범용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른 시스템의 자료도 얼마든지 변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 것입니다). 하지만 "범용성이 특수성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이런 기준들에 근거한 것이 아닌, 그저 무책임한 추측에 지나지 않더군요. 실제로도 보면 GURPS WoD가 원판보다 낫다는 평가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의 스토리텔러 시스템은 참 많이 우울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