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RPG에서 전투가 왜 재미있죠?(천승민) http://sessionrpg.cafe24.com/bbs/10319

예전에 승민님이 RPG에서 전투가 왜 재미있나..란 화두를 던진 적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플레이를 돌아보면, 전투 모드와 비전투 모드(스토리 모드? --;)가 구별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마치 컴퓨터 RPG처럼 말이죠. 아무래도 기존 RPG에서 전투에 관한 룰이 훨씬 더 세부적으로 발달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기선 그런 전투 룰로 인해, RPG에서 전투가 갖는 속성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전투(혹은 전투 룰)가 재미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죠. 다른 비전투 상황도 같은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겠죠.


1. 전술성

'전술성'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선택이 존재하고, 합리적 추론을 통해 이 중 보다 유리한 선택을 고를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바둑이나 장기, 체스 같은 게임에서 두드러질 터입니다.

전투 룰은 많은 경우 여러 선택을 제공하고, 상황에 따른 적절한 선택에 이득을 줍니다. 물론 대화/교섭이나 조사/탐색 등 다른 비전투 장면에서도 전술성은 존재하죠. 주된 차이는, 비전투 상황에서 '유리한 선택'(적절한 대응)은 주로 마스터가 개별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데, 전투 상황에서는 '유리한 선택'이 세부적인 전투 룰에 의해 객관적으로 도출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를 설득하는데 적절한 논리와 접근을 취하면 판정에 보너스를 준다거나 할 수 있죠(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한다거나, 관련 인물의 추천장을 얻어온다거나 등).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시스템(룰)에서 명시적으로 도출되진 않습니다. 한편 전투 룰은 가능한 행동과 그에 따른 효과가 훨씬 명백하고 직접적입니다. D&D 3rd라면 파워 어택을 몇 점 때릴 때 가장 효과적인지, GURPS라면 상대가 녹다운당했을 때 전력공격과 공격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 같은 면이 룰에서 도출될 수 있습니다. 더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고요(장기 등에서도 수를 읽기 어려울 때가 더 재미있죠^^).

정리하면 RPG에서 (여러) 전투 룰은 룰에 근간한 전술적 선택을 뒷받침해줍니다.


2. 불확실성

불확실성은 결과를 100% 확률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기대값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대값은 예상되지만, 어느 결과가 나올지 확정지을 순 없다는 거죠.

윷놀이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윷놀이에서 사실 전술적인 선택의 여지는 크지 않습니다. 어떤 말을 전진시킬지, 남은 말을 새로 올릴 것인지, 혹은 윷/모 등으로 굴림이 여러번일 때 이를 어떻게 배분해 움직일지가 전부입니다. 선택이 뻔한 상황도 많습니다. 근데도 윷놀이는 재미있습니다. 아마 윷을 던질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긴장감 때문이겠죠. 바로 이것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종의 '도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불확실성은 전투 룰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주사위나 카드 등 난수를 기반한 판정 규칙은 뭐든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죠. 반면, 불확실성이 별로 없는 전투 룰도 가능합니다. 최근 Mortal coil이란 인디 RP를 플레이하고 있는데, 가지고 있는 토큰을 배정해서 판정을 취합니다. 결국 상대방이 어떻게 토큰을 배정할지가 불확실성인데, 그게 뻔해지는 상황에선 재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덩달아 전술성도 약해지고요--;).

한편 전투에서 불확실성이 주는 재미는, 도리어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기대값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대값이 있기 때문에 의외성이 나올 수 있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저희 팀 플레이에서, 전력공격 2번이 모두 최대 대미지가 나와 1턴 만에 NPC가 죽어버린 일이 있어요 (http://wishsong.egloos.com/3808677). 모두가 예상치 못한 극적인 전개라 재미있었죠. 반면, 비전투 상황의 판정은 대개 목표치가 숨겨진 상태라 잘 가늠하기 어렵고(숨겨진 보너스/페널티라든지), 그래서 재미가 좀 떨어지진 않을까 란 생각도 듭니다.


3. 체험성

체험성은 '가상 체험'으로서 얼마나 피부에 와닿게 느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RPG는 그런 점에서 '직접 경험'에 가장 가까운 간접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자신이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 결과를 되돌려 받는 시뮬레이션의 특성이 있죠.

전투 룰은 전투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처리해서 '가상 체험'을 뒷받침해줍니다. 예를 들어 HP나 쇼크 페널티 등을 통해 내가 얼마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는지,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지 체감할 수 있죠. 또한 전투에서 가능한 여러 행동이 명시되어서 맞싸울지 도망칠지 등 행동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그 결과를 되돌려 주기에 적절한 룰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투 상황에 대한 체계적인 시뮬레이션으로 구현되어 있죠. 반면, 비전투 상황의 경우, 험한 산길을 오르면서 겪는 어려움이나 피로... 같은 건 그만큼 잘 와닿진 않는 것 같습니다(FP 손실이나 피로 상태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한편 체험성에 꼭 룰에 의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대화/교섭 장면에서 서로 대사를 주고 받으며 롤플레이하면서 충분히 현장감을 느낄 수 있죠(어찌 보면 정말 직접 체험이고요). 다만 결과 판정으로 이어지면, 롤플레이와 판정 자체는 서로 좀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판정에서 느껴지는 체험성은 좀 부족하달까요. 그런 점에서 전투 룰은, 체험성과 판정 룰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면이 독특한 것 같습니다. 룰이 가상체험을 지원해준다는 거죠.


여기까지 전투가 다른 비전투 상황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를, 전투 룰에서 유래되는 속성들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투 룰이 훨씬 상황을 구체적, 체계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게 핵심인 듯 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좀 추상적인 얘기가 되었는데, 좀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할 듯도 싶고요. D&D 4th의 Skill challenge 같이 멀티 스테이지 기법으로 비전투 인카운터를 보다 흥미롭게 하려는 시도도 많은데, 그런 데에도 참고가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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