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을을 덮친 트롤들, 그 녹색의 야수들과 싸웠다. 그 때 죽었어야 했다. 불운하게도 아내는 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지독한 굶주림이 나를 사로잡았다. 열병에 시달린 사흘 동안,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 속도 시꺼멓게 타버렸다. 내 속에 생겨난 텅빈 무(無)의 공간은 탐욕스럽게 갈구했다. 먹을 것을.

아내가 애써 떠먹인 죽을 나는 모조리 토해냈다. 그것은 죽은 것, 상한 것, 생명을 잃은 것. 나는 날 것을, 생 것을 먹어야 했다. 나는 항상성을 잃어버렸다. 내 안에서는 시시각각 생명이 붕괴되어 빠져나가고 있다. 생명을, 날 것 그대로의 유기물을 취하지 않으면 내 몸을 지탱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이미 반쯤 파괴되어 있었기에, 아내는 나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대다수 트롤의 희생자들이 그랬듯이. 아내는 나와 영영히 한 몸이 되었다. 내가 결단코 바라지 않은 방식으로.

나는 그제야 깨달았고 미쳐 날뛰었다. 혀 끝에는 내 안의 인간을 다시 일깨운 분홍빛 살점의 감촉이 선명했다. 나는 미친 듯이 내달리고 또 내달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검푸르게 우거진 깊숙한 숲 속이었다. 또다시 견딜 수 없는 허기가 엄습해왔다.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 내 목구멍 속의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아우성쳤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입에 쳐넣었다. 열매든 잎사귀든 나무껍질이든 가리지 않고. 가장 원초적인 삶의 본능에 매여 나는 정신없이 풀을 뜯다 잠들었다.

나는 따가운 햇빛에 몸을 뒤틀며 깨어났다. 팔다리가 뻑뻑하게 느껴졌다. 골격이 며칠 새 웃자란 탓에, 몇 번이고 넘어진 뒤에야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살거죽은 녹색빛으로 변했고 소나무 껍질마냥 단단해졌다. 그리고 햇볕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몸을 헤집고 파고들었다. 격렬한 거부반응에 몸부림치며 나는 빛을 피해 동굴로,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밤을 기다렸다.

더 이상 식물을 먹을 수는 없다. 나는 어스름과 함께 찾아오는 사냥의 때를 기다렸다. 나는 인간이었을 때도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더욱 능한 밤의 포식자다. 기는 것, 뛰는 것, 날개달린 것, 헤엄치는 것, 무엇이든 잡히는 대로 먹어치웠다. 그래도 나날의 굶주림을 채우기가 급급할 뿐이다. 이제 내 눈은 별빛 아래서도 환하고, 내 다리는 노루보다 날래며, 내 이빨은 승냥이보다 게걸스럽게 고기를 탐한다. 채 식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싱싱한 날고기를. 그것만이 끝없이 스러져가는 내 몸을 지탱할 수 있기에. 내가 먹는 것들이 나를 이룬다.

겨울이 왔다. 들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밭에 뿌려진 핏무리 위에 두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하나는 양, 다른 하나는 양치기. 물론 내가 이렇게 사고할 수 있게 된 것은, 소년의 몸이 절반 쯤 뜯어먹힌 뒤였다. 왠지 목이 메어온 것은, 내 안의 굶주림이 잠잠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녀석은 지금도 실낱같은 내 이성을 뒤흔들고 있다. 눈 앞이 살짝 어지럽다.

나는 가벼워진 양치기를 들쳐메고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 내가 지금 마음 먹은 일을 때늦기 전에 마칠 수 있을까.

나는 먹으며 걸었다. 인간됨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끝이다. 위태롭게 한발짝 한발짝 걸어 올라간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차가운 바람이 상쾌하다 못해 살을 저며오는 듯 불어닥친다. 발 끝 너머를 내려다본다. 좋다. 높이는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껴둔 연분홍빛 살덩이를 꺼내들었다. 윤기도는 빛깔과 물컹한 감촉이 탐스럽다. 그리고 삼켰다. 이윽고 뭔가 뜨듯미지근한 것이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무언가 속에서 끓어오르듯 맴돌고 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낭떠러지 너머로 한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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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PS 실피에나]에 나오는 '칼리스토의 트롤'를 재해석해본 팬픽입니다. 원 설정은 마법적 오염으로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 사람들이지만, 만일 트롤이 자신의 육체/생명의 구성을 서서히 잃어가고, 이 것을 다른 생명체를 먹어 벌충하는 거라면 어떨까란 아이디어죠. 트롤의 강인한 녹색 피부와 늘어난 골격, 재생력도 식물에서 받은 것이고, 강화된 신체 능력도 동물들을 잡아먹어 생긴 걸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무엇보다도, "인간이 되려면 인간을 먹어야 한다"는 모순이 맘에 들었었습니다. :D

습작이라 비평이나 조언 환영해요. 이것저것 멀티 엔딩도 생각 중이긴 합니다. ^^;

@ 실피에나 발매 1주년에 맞추었으면 좋았겠지만, 바쁘다보니 글로 옮기는게 늦었네요. 허허;
@ 게시판 분류가 애매하긴 하지만, 일단 [플레이] 게시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