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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RPG의 첫 걸음을 떼려는 분들 대상으로 글을 몇 번 쓴 적이 있지만, 좀 더 총체적인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 쓰려고 합니다. 곳곳의 커뮤니티를 볼 때 (그리고 초여명 매출을 볼 때) 최근 RPG에 대한 관심이 약간이나마 늘어난 것 같거든요.
여하튼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많은 의견 부탁 드립니다.
TRPG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RPG라고 하고 싶네요 . . . 제목은 비록 "TRPG를 해 봅시다"로 했지만 본문에서는 제 취향상 계속 RPG라고 부르기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TRPG"는 일본에 RPG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미 RPG라고 하면 컴퓨터 RPG를 가리키는 말로 고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어입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냥 RPG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일본과 사정은 마찬가지라 TRPG라는 단어가 넘어와 쓰이지만, RPG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RPG라고 그냥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1. RPG를 하려는 이유
RPG를 처음에 시작하려는 분들께 묻고 싶은 것은 왜 다른 것을 제치고 RPG를 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에 재미를 느끼느냐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구나 재미를 원해서 오지만, 품고 있는 기대는 각양각색입니다.
A.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서 모험을 할 수 있으니까 RPG를 해 보고 싶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보편적인 기대입니다. 저도 제일 처음에 RPG를 시작했을 때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무려 1989년이어서 지금과 사정이 좀 다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모험을 하겠다는 기대 자체는 이제 RPG만이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컴퓨터 게임 중 아마도 열의 여덟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하는” 것일 터입니다. CRPG가 대표적인 예이지만 액션 게임도 요새는 괜찮은 줄거리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추고 있지요. 수십 수백억을 들인 덕분에 영화 뺨치는 화면, 프로 작곡가가 만든 배경 음악, 전문 작가가 만든 줄거리와 캐릭터 디자이너가 만든 주인공을 보유한 것이 현대의 게임입니다. 이에 견줄 만한 것을 불과 한 줌의 사람들이 모여서 취미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입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B. "나만의 캐릭터로 나만의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으니까 RPG를 하고 싶어요."
컴퓨터 게임은 대개 개발사가 이미 만들어 놓은 캐릭터로 플레이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있기는 하지만, 그 캐릭터가 처한 입장이라거나 해야 하는 일이라거나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요. RPG에서는 그보다 큰 자유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RPG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팀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컴퓨터 게임에서보다도 더 부자유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캐릭터를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진행에 있어서도 팀의 필요에 의해 자기의 의사를 조정해야 하는 일은 흔합니다. 자기의 뜻을 온전히 펼쳐나가기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글을 쓰거나 만화를 그리는 것이지, RPG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C.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RPG를 하고 싶어요.”
RPG의 결과로 나왔다고 전해지는 소설이나 만화 등등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한 인기를 끌어 외국에서 수백만부의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서 RPG로 이런 멋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아쉽지만 속으신 겁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나중에 대거 첨삭을 가한 것입니다. RPG 플레이로 나오는 이야기는 그 과정의 특성상 구멍과 군더더기가 많고, 작가가 만든 소설이나 만화, 영화 등에 비해 품질이 떨어집니다.
D. “컴퓨터 RPG를 좋아하니까,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별로 없는 듯한 기대입니다. CRPG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멋진 그래픽과 정교한 캐릭터 성장 시스템, 치밀한 밸런스 등등에 관심을 갖습니다. RPG는 그 부분에서 사실 떨어집니다. 그래픽은 일단 있지도 않고, 계산을 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에 캐릭터의 성장이나 장비에 관한 시스템도 단순합니다. CRPG는 게임 제작자가 만들어 놓은 상황의 범위 내에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지만 RPG는 그 자유로운 특성상 이런 식의 밸런스 조정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RPG는 컴퓨터 게임이 발달하고 보편화되기 전에 등장한 놀이여서, 처음에 갖고 있었던 특징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상당수가 컴퓨터 게임에 발전적으로 흡수되었습니다. 한때는 RPG의 특징이었던 것이 이제는 아니게 된 것입니다.
E. RPG만의 특징
하지만 어떤 게임도, 소설도, 영화도, 만화도 할 수 없는 것이 RPG에는 남아 있습니다. 만들고 보고 겪는 세 가지를 모두 동시에 할 수 있는 놀이는 이것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특징 때문에 위에 언급한 단점들은 상쇄되고도 남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RPG에서, 이야기는 플레이를 통해 계속 그 자리에서 만들어집니다. 캐릭터(등장인물)들도 플레이를 통해 능력이 변하고 사정이 변합니다. 이 역동적인 변화는 자기가 혼자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같이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가 벌어지고, 그 영향은 자기가 맡은 캐릭터를 통해 고스란히 겪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와 혼란을 보는 것은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수동적인 경험과는 사뭇 다릅니다. 만들고 보고 겪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짐으로써 상승작용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팀에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자기 팀 플레이의 내용이 어지간한 영화보다 재밌게 느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것은 그 내용이 정말로 영화보다 좋아서가 아니라, 저 상승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것을 원하신다면 RPG를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다른 데 시간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직접 겪어 보면 생각이 변할 수도 있고, 뭔가 다른 점에서 재미를 느끼실 수도 있으니까요.
2. RPG를 하기 전에 준비할 것들
RPG에는 노력이 듭니다. 팀을 꾸려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야 하고, 제대로 하려면 룰북이라는 책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A. 팀의 구성.
대부분의 RPG 팀은 1주일에 한 번 만나서 플레이를 하며, 한 번에 보통 4~6시간 정도를 소비합니다. 한국과 같이 남녀노소가 모두 바쁜 사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연달아 그 정도의 시간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석이나 지각, 도중하차는 큰 폐를 끼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RPG를 시작하기 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시간을 낼 수 있으며 앞으로 언제까지 그것이 가능한지 꼭 확인하십시오.
한 팀은 대개 4~6명 정도로 이루어집니다. 이중 한 명은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들(NPC라고 합니다) 및 그 외 주변 환경을 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각기 주인공급의 캐릭터를 한 명씩 맡아서 합니다. 주인공급을 맡은 사람을 “플레이어”, 나머지 한 명을 “마스터”라고 합니다.
마스터는 담당하는 요소가 많다 보니 아무래도 이야기의 진행에 남들보다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룰의 해석을 하는 “심판”의 역할을 겸하기도 합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 하나만을 맡지만, 그 캐릭터는 주인공입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들에게 얼마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지를 생각하면 마스터에 비해 그리 가벼운 역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팀을 구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구인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많은 초보자분들이 “데려가 주세요” 하는 글을 올리시는데, 팀을 구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구인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막연히 데려가 달라는 사람을 데려오는 것보다 플레이 개요와 신청 조건을 명시한 구인글에 응답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초보자가 참가할 만한 구인글이 없으면 스스로 마스터를 맡겠다고 나서는 것이 좋습니다. 마스터의 역할이 어렵고 책임이 무겁다는 선입견은 잊으십시오. 룰을 익히고, 준비를 잘 하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한 팀에 다섯 명이 있고 그 중 한 명이 마스터라면, 세계 전체 RPG 인구의 최소 20%는 마스터를 해 본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플레이어가 항상 플레이어만 하는 것도 아니니 아마 50%도 넘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고 노인도 있습니다. 그게 어려워 봤자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마스터링의 요령에 대해서는 뒤에 더 설명하겠습니다.
시작은 단편으로 할 것을 권합니다. 장편은 몇 개월은커녕 몇 년씩 지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RPG가 발명될 당시의 플레이가 아직도 지속 중일 정도입니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처음에 시작할 때 너무 거창하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욕심 없이 짧게 끝내고, RPG가 할 만하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면 그때 장편을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단편은 모집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B. 룰북
RPG를 제대로 접해보지도 않고 구입하기에 룰북은 비싼 감이 있습니다. 수입서적도 그렇고, 국내 출간된 GURPS도 고민 없이 척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닙니다. 무료로 공개된 룰북이 이럴 때 편리하지만, “마이너한” 룰북은 아무리 무료라도 구해서 익혀 봤자 같이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GURPS 국문2판 경량판을 추천하기로 합니다. 일단 한국어로 되어 있고, 이것으로 익히면 정식 GURPS로 넘어가기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초보자가 GURPS 경량판만 갖고 플레이 전체를 꾸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는지는 나와 있는데 “뭘” 하는지는 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가능한 한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3. 이 글의 몇 가지 전제들
까다로운 얘기를 가능한 한 뒤로 미루고 싶었지만, 이 글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일단 지적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특정한 플레이 방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RPG를 하는 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여기에 나온 것이 RPG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특정한 방식을 전제로 한 것은 그것이 초보자가 접근하기에 쉬우면서도 RPG의 많은 면들을 접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스터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인 플레이도 있고,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숙련된 마스터가 모든 것을 준비해 오고 플레이어들은 그냥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는 플레이 방식도 있지만, 그것을 전제로 해서는 글 앞에서 언급한 RPG의 특징을 체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마스터링을 하려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GURPS라는 RPG 시스템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어로 출간되고 있는 유일한 RPG 서적이며, 경량판이라는 무료 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GURPS는 “범용 룰”이기 때문에, 관심 분야가 판타지이건 홍콩느와르이건 SF이건 커버가 됩니다. 룰 자체도 20년 넘게 사용되고 검증되었지요. 하지만 이 글에는 룰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으니, 다른 시스템으로 시작하더라도 초보용 지침글로서의 유용성이 심하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RPG가 어떤 건지 대충 알기는 하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RPG가 대화로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아주 기본적인 부분은 일부러 뺐고, RPG의 보다 심오한 부분에 대해서도 많은 누락이 있습니다. 이 글이 이해가 안 가시는 분은 일단 RPG의 모습을 대충 파악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글을 읽고 RPG 공부를 더 하고 싶으신 분은 여러 커뮤니티의 관련 게시판들을 참고하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세션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꽤 괜찮습니다 ^^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환상주사위 보니까 재밌을 것 같애요."하면서 오는게 태반입니다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