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실제 플레이

시나리오가 준비되고 사람이 모이면 바야흐로 플레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A. 마스터의 역할
마스터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NPC들을 맡아서 플레이하는 것이고, 둘째는 PC의 행동에 대하여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 셋째는 룰에 대해 최종 해석을 내리는 것입니다.

 

NPC의 대사나 행동은 간결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인공은 플레이어들이 맡은 PC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NPC가 너무 설치면 플레이어들은 구경꾼이 되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NPC가 등장했을 때는 이 사람이 이 장면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되새기십시오. 그 역할의 범위를 너무 넘어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플레이어가 PC의 언행을 묘사하면 마스터는 그에 따라 반응을 합니다. PC가 깡통을 걷어차도 마스터가 반응하지 않으면 깡통은 날아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RPG는 플레이어와 마스터가 반응을 주고받는 것이 그 전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플레이어의 의도를 알고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C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마스터가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하면 단추를 틀린 구멍에 낀 꼴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의도가 불확실하다면 그 행동은 어떤 생각으로 한 것인지를 물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플레이어가 큰 기대를 하고 PC에게 어떤 행동을 시켰는데 마스터가 그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면 플레이어는 실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그저 멋을 부렸을 뿐인데 심각한 결과가 나온다면 당황하기 쉽습니다. PC의 행동 자체보다는 플레이어가 그 행동에 거는 기대가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 부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플레이어가 예상한 결과만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대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크기에는 부합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의도로 한 행동에는 좋건 나쁘건 큰 결과가, 작은 의도로 한 행동에는 좋건 나쁘건 작은 결과가 따르게 하십시오.

 

룰을 해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룰의 적용에 대해 불확실한 점이 있는 경우에는 효율을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정확한 룰 적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신속한 결단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역할은 마스터가 맡는 것이 전통적입니다. 설령 룰을 몇 개 틀리게 적용했다고 해도 플레이가 바로 재미를 잃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염려 마십시오. 혹시 실수를 했다면 플레이어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하고 다음부터 제대로 적용하면 됩니다. 룰을 틀리게 적용했다고 플레이어가 지적하면 즉시 확인을 하되, 이런 일이 너무 잦아지면 원활한 진행을 위해 조금 참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상황 묘사는 너무 장황해도 좋지 않지만 실제로는 너무 간결해서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머릿속에 그린 광경을 말로 구석구석 꼼꼼하게 옮길 필요는 없지만, 그 장면에서 중요한 사항을 빼먹어서는 안 됩니다. RPG에는 그림도 음향효과도 없습니다. 분위기의 전달은 묘사로 하는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묘사가 부족하면 마스터의 상상과 각 플레이어들의 상상이 서로 어긋나게 되고, 한참 동안 서로 완전히 딴 소리를 하는 경우도 일어납니다.

 

B. 플레이어의 역할
군대에서 신참이 실수가 잦은 이유 중 하나는 실수를 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익숙하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면 누구나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오히려 더 실수를 합니다. RPG에서 초보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조심한 나머지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 안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손해고 같이 플레이하는 사람도 손해입니다. 겁 먹지 마십시오.

 

캐릭터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움직이는 것이 플레이어의 기본 역할입니다. RPG에서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을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기 캐릭터가 할 법한 언행을 하고 하지 않을 법한 언행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캐릭터를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버하기 쉽습니다. 연기는 프로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점은 드라마를 보면 압니다. 아마추어의 섣부른 시도는 오로지 닭살을 일으킬 뿐입니다. 캐릭터의 표현은 피상적인 묘사보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중점을 두십시오.

 

자기 캐릭터의 능력은 캐릭터 시트에 나와 있습니다. 특히 기능 부분을 유심히 보십시오. 뭘 하는 기능인지 정확히 모르면 룰북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그래도 모르겠으면 “이 기능을 사용해서 이러이러한 걸 하고 싶은데 되나요?” 하고 물으십시오.

 

꼭 기능을 사용해야만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순간에서의 결단은 캐릭터의 기능보다는 인격에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 캐릭터가 할 법한 행동이라고 생각되면, 그리고 그것이 플레이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면 일단 움직이고 보십시오. 특히 캐릭터가 가진 단점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격상의 단점을 택하여 CP를 받았다면 충실하게 플레이에 반영해 주십시오.
 
흔히 마스터가 플레이를 진행하는 역할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능동적으로 나서서 일을 벌이는 이야기가, 단지 벌어지는 일에 반응하기만 할 뿐인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동적인 반응은 되도록 마스터의 몫으로 하고, 주인공을 담당하는 플레이어는 가능한 한 캐릭터를 능동적으로 움직여 이야기를 진행시키십시오.

 

일단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대원칙을 이야기했으니, 언제 잠자코 있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겠습니다. RPG를 할 때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내가 너무 튀어서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나만 너무 나서는 것은 아닌지? 혹시 다른 사람의 말을 끊고 있지는 않은지? 뭔가 일이 일어나면 사람마다 반응시간은 다릅니다. 생각하느라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온라인 플레이라면 타이핑이 느려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생각이 빠르거나 (또는 없거나) 타이핑이 빠르기 때문에 항상 먼저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남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주변을 배려하십시오.

 

C. 모두의 역할
플레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예를 들어 진행이 막혔다거나, 처진다거나 할 때의 책임은 마스터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플레이어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팀 전체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옆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플레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항상 신경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옆 사람이 자기한테 신경을 쓰기 좋게 플레이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틈나는 대로 피력하는 것도 좋은 버릇입니다. 너는 네 할 일을 해라 나는 내 갈 길을 간다는 태도로는 좋은 플레이가 되기 어렵습니다.

 

플레이가 시작되기 전, 중간의 쉬는 시간, 끝난 직후에, 그간의 플레이는 어디가 좋았고 아쉬웠으며 다음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섣불리 평을 했다가 상대의 마음이 상할까 봐서 걱정이 된다면 플레이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위주로 하면 좋습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돕는 팀이 좋은 팀입니다. “이기적인” 플레이, 즉 자기가 원하는 것만 챙기려는 태도가 유리할 것 같지만, 결국 팀이 재미를 잃으면 자기도 재미가 없게 됩니다. 마스터도 플레이어도 이런 식으로 자멸하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D. 시나리오의 용법
위에서는 시나리오를 장면으로 나열해서 만드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진행 자체는 간단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정됩니다. 하지만 장면 내에서는 다양한 모습들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시나리오를 준비할 때도 그렇고, 실제 플레이에서 사용할 때도 그렇습니다.

 

세부 설정을 해 놓은 것이 있더라도 플레이가 그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마스터가 준비해 놓은 것이 아까워서 플레이어들을 그쪽으로 유도한다면 플레이어들은 그 순간 자리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그저 마스터에게 끌려 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플레이는 마스터의 준비를 벗어나지 못한 미숙아가 되어버립니다.

 

시나리오는 플레이 도중 바뀔 수 있으며, 바뀌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모로 가도 다음 장면으로만 가면 됩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즐기세요.

 

그렇다고는 해도, 장면의 의의나 시나리오의 목적을 오해한 플레이어가 자기도 모르게 장면을 망치는 경우가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보다 숙련된 팀이라면 이런 것조차도 새로운 창작의 발단으로 삼을 수 있지만, 초보 마스터라면 이런 경우 플레이어의 오해를 해소하고 양해를 구하여 플레이의 방향성을 회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과 팀의 기량을 잘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처합시다. 물론 당초에 그런 오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최고이지만, 그게 항상 되는 것은 아닙니다.

 

E. 룰의 용법
RPG의 룰, 그 중에서도 GURPS의 룰은 특히 도구에 가깝습니다. 플레이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상황을 객관적이고 일관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룰입니다. 경량판에만도 상당히 많은 상황을 다루는 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닥쳤다고 해서 꼭 그 룰을 적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RPG와 보드게임의 차이 중 하나입니다. 룰을 적용하기 전에 마스터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룰을 적용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플레이의 흐름 사이에 저울질을 하는 것입니다. 숨가쁜 활극이 펼쳐지는 와중이라 호흡이 중요한 상황에서 잘 쓰지도 않는 룰을 찾아 보고 적용하느라 시간을 보낸다면 플레이의 김이 빠지겠지요. 룰을 잘 알면 빠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플레이의 흐름이 좀 느린 상황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룰을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룰을 적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를 모두 고려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뒤도 옆도 막히고, 갈 길은 절벽을 건너 뛰어 반대편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고 합시다. 건너 뛰는 데 실패하면 용암 속에 떨어져 죽습니다. 성공하면 삽니다. 여기서 도약에 관한 룰을 적용하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 캐릭터가 떨어져 죽어도 되고 살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룰을 적용하십시오. 살아야 한다면 룰 적용 없이 그냥 점프에 성공했다고 하십시오. 당초에 이렇게 플레이를 한 구석으로 몰아 넣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좋지만, 하다 보면 그런 날도 옵니다.

 

마지막은 그 룰이 적용되기를 팀원들이 기대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투 룰은 전투 상황이 되면 “당연히” 적용되는 것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룰을 적용하십시오. PC가 가진 특기나 특수 능력 같은 것도 대체로 룰을 적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플레이어는 그 룰이 적용될 것을 기대하고 캐릭터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룰이 적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마스터가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대체하면 플레이어들은 전횡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팀원들이 적용하기를 바라는 룰은 적용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잘 설명합시다.

 

5. 그 뒤는 어떻게?
첫 단편을 마쳤으면 일단 RPG가 어떤 것인지 감은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RPG를 계속 할지 그렇지 않을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 선택할 때입니다.

 

계속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단편 플레이를 몇 번 더 해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RPG를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다음 사항을 고려하십시오.

 

우선은 고정 팀을 만들거나 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같이 오래 플레이하면 그만큼 플레이도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오프라인 팀의 경우 플레이는 팀원 중 누군가의 집이 최고이지만, 조용한 카페에서 조용히 플레이를 해도 괜찮습니다. 버거킹에서 RPG를 하는 여고생 팀을 본 기억이 납니다 . . . 오프라인 팀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왕복에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가까이 사는 친구들 중에 같이 RPG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관심 없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들여봤자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듭니다.

 

온라인 플레이를 하려면 최소한 IRC 사용법 정도는 익혀 두십시오. mIRC에 주사위 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어지간한 플레이는 할 수 있습니다. RPG 전용 유/무료 프로그램도 상당수 있습니다. 온라인 팀은 구하기 훨씬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참가를 결정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오프라인 팀에 비해 지각, 결석, 중도하차가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고, 같은 내용도 플레이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룰북을 마련하십시오. 어느 취미에건 처음에 투자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일단 결심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습니다. RPG를 하겠다는 마음이 확실히 섰다면 책을 사는 것이 좋습니다.

 

RPG 공부를 계속 하십시오. 사람은 뭘 좀 알았다 싶으면 그게 전부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경험과 연구를 통해 자기에게 맞는 플레이를 찾아가는 과정이 RPG 라이프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스템도 접해 보고, 새로운 방식의 플레이도 해 보면 좋습니다.

 

비슷하게, 고정 팀이 있고 서로 익숙해져서 플레이에 불편이 없더라도 때로는 새로운 사람과 함께 플레이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하나의 팀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도 입력도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플레이하고 있는지 보고 겪는 것도 팀의 플레이에 도움이 됩니다. 팀 외에서의 플레이가 여의치 않으면 리플레이도 읽어 보고 참관도 해 보십시오.

 

6. 마지막으로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PG는 하다 보면 늘지만 처음에 시작하기가 어려운 것이 고질적인 문제여 왔습니다. 아무쪼록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초보 시절 아무 것도 몰라서 어려워하던 기분을 잊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RPG를 하고는 싶지만 뭘 물어봐야 될지조차 몰라서 헤매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