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이전에 나온 것은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이란 거의 있을 수 없겠죠.
하지만 이전에 나온 작품을 바탕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2차 창작물이라고 부르는 부류가 있다면, 1차 창작물도 있는 것이죠. 둘 다 예전에 나온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러나 1차 창작물은 이전의 작품과 흐름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것을 만드려 한다면, 2차 창작물(팬픽, 오마쥬, 패러디, 혹은 아류작 등등)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원본에서 빌려온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즉, 1차 창작물은 가능한한 전작들에서 벗어나 새로워지는 게 이상이지만, 2차 창작물은 처음부터 원작의 매력을 재생산/이용하는데 치중합니다.
넓게 보면 둘 다 창작 활동이라 볼 수 있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결국 2차 창작은 생산자(창조자)기보다 소비자로서의 양태라 생각됩니다. 원작을 다른 식으로 '소비'하는 행동이랄까요. 2차 창작이 원작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지만, 이 것은 또다른 소비와 2차 창작을 부를 뿐이지, 정말 새로운 1차 창작을 촉발하기는 어려워보입니다. 2차 창작은 갈수록 복제를 거듭하면서, 작품 원래의 힘을 잃고 단편적, 말초적인 형태로 퇴화하기도 쉬운 것 같고요. 양판소나 속칭 '모에 코드'에 의존하는 애니/라노베 등을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찌보면 아이돌 그룹이나 다른 대중문화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상업적으로는 성공한, 검증된 작품/장르를 재생산하는 게 이득이니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위해선, 1차 창작을 위한 노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특히, 저는 RPG가 단순히 모방이나 2차 창작에 그치지 않고, 뭔가 나름의 독창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흘륭한 창작물을 만드는게 목표는 아니지만, 기존의 작품/코드를 답습하며 욕망을 투사하기만 해선 좀 아쉽습니다. 나름의 재해석, 재창조가 따르지 않는다면,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도 쉽게 질려버릴 수 있을 거 같고요. [메리 수]나 중2병 식 캐릭터, 혹은 다른 작품/매체를 일방적으로 따온 설정들이 얄팍해보이는게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첫머리에도 말했듯, 모방 없는 창조란 없겠죠. 하지만 기왕이면 창조를 위한 모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방을 위한 창조가 아니라요.

그리고 이걸 딱히 좋다/나쁘다로 갈라서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객관적인 분별 기준이야 물론 있지만, 메리수 팬픽 쓰는 사람은 (또는 캐릭터 빌드하면서 핵앤슬래시 하는 사람은) 그게 주관적으로 즐거워서 하는 거지, 객관적 잣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없거든요. 이 사람은 "고급스러운" 창작이나 RPG 등등으로 즐거움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초에 그걸 원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사금 나오는 강에서 조약돌 줍는 게 한심해 보일 수는 있지만 조약돌 주우러 왔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객관적인 품질의 기준에 따라 수준을 높인다는 말이 적용되려면 애시당초 그 사람이 그 기준의 선상에 스스로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헌데 그 기준을 따라서 발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소설은 독자가 따로 있어서 피드백이 들어오기 때문에 작가의 태도가 변할 기회가 많습니다만, RPG는 그 특성상 그럴 기회가 거의 없지요. 소설도 장르가 폐쇄적이고 독자층이 제한되어 있어 "근친교배"가 일어나면 내부에서의 독자적인 기준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보다 보편적인 기준과 일치할 가능성은 또한 낮습니다. (그런 근친교배적 기준의 유명한 예로 어느 출판사 편집자가 작가 지망생에게 제시한 '판타지 소설이 갖춰야 할 요건'이 있는데... 오래된 얘기라 검색에서 잡기가 어렵네요.)
얘기가 괜히 장황해졌는데... 요약하자면: 그게 좋다고들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