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1. 거부하지 않기: 동의의 법칙
요즘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 (Blink)를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는데...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을 다룬 이 책 중에는 즉흥 코미디를 다룬 대목이 있습니다.
이게 RPG에도 시사성이 있는 얘기인지라 대략 옮기자면...
즉흥극 (improvisational theatre, improv)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대본 없이 즉석에서 만들어가는 연극을 가리킵니다.
역시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RPG와 비슷한 점이 꽤 많죠, 판정 규칙이 없는 점만 빼고.
대본도, 규칙도 없는 만큼 배우들의 대사나 행동에 서로 반응하면서 극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얼핏 아무 법칙이 없이 무작위적이고 제멋대로일 것 같지만,
사실 즉흥극에는 이론도 있고 방법론도 있습니다. 가르치는 강좌도 있지요.
즉, 임기응변에 의존하기는 하되 아무 임기응변이나 다 좋은 즉흥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즉흥극을 만드는 임기응변의 원칙, 검증받은 방법론이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제1의 원칙은 동의의 법칙 (the rule of agreement)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배우가 하는 제안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의사 역을 맡은 배우가 환자 배우에게 다리를 절단하자고 한다거나,
경찰 역을 맡은 배우가 도망치는 도둑 역 배우에게 힘드니까 잠시 쉬자고 했을 때
그 제안에 거절하지 않고 동의하면 즉흥의 가능성은 거침없이 뻗어나갑니다.
거절하고 싶은 제안이야말로 이야기에는 최고의 소재이니까요.
안전하고 무난한 제안 (진통제를 먹자, 계속 도망쳐라)만을 받아들이면 그만큼
안전하고 무난한 즉흥극을 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하기 쉽습니다.
순간이라도 거부감이 들 만한 극단적이고 엉뚱한 제안이라도 받아들이고
그런 싫은 제안의 가능성에 마음을 마음을 열어두면 극은 훨씬 의외성이 강해지고,
또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 동의의 법칙의 근거입니다.
2. RPG에 적용하기
RPG는 어떨까요?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이, 상대가 하는 서술이 싫은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나치게 강한 적과 마주쳐서 패배한다거나, 가족 등 중요한 NPC가 죽는다거나, 심지어 자기 PC가 죽는다거나.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 서술이 싫다는 것은 곧 그 서술의 풍부한 극적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안전하고 예측할 만한 영역에서 벗어나, 인물과 이야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절호의 기회이지요.
강력한 전투력이 자랑인 나의 인물이, 우리 일행이 패배한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 것이며,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든, 더 열심히 수행하든, 삶의 방식에 회의를 품든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갈까요?
주변사람, 혹은 심지어 자신의 죽음이 내 인물에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얼마나 신선한 자극이 될까요?
물론 모든 서술이나 제안이 언제나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야기를 재미없게 하는 뻘짓도 분명 있지요.
전투마다 PC 일행을 무참하게 깨뜨리며 '강한 내 PC'라는 신념을 뭉개는 걸 즐기는 작자 진행자도 있고,
공들여 설정한 NPC, 심지어 PC를 생각없이 죽이며 아무런 극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도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RPG에 동의의 법칙을 적용하는 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내가 거부감이 드는 저 제안을 저 참가자나 진행자가 하는 것은
날 골탕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 서사를 더 풍부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물론 그 신뢰를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 말했듯, 그런 신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무능한, 혹은 무배려한, 혹은 감각이 너무 안 맞는 진행자와 참가자도 분명히 많이 있으니까요.
RPG라는 취미가 인맥 중심, 아는 사람 중심으로 끼리끼리 뭉치는 것도 결국 신뢰의 문제겠지요.
그리고 그런 신뢰를 쌓기 위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상대의 의도를 잘 알 수 없을 때, 이 제안을 인정하는 것이 과연 좋은 서사로 이어질지 의구심이 들 때,
마스터, 왜 PC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거야? 정말 이거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려나? 내 생각은 좀 다른데...
하고 확인을 구하고 서로 원하는 방향을 토의하고 수위를 조절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해서라면, 그리고 공동 서사의 의외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상대의 제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그 위에 반응을 쌓아가는 것은 가히 폭발적인 가능성을 몰고 옵니다.
3. 동의의 법칙: 우주공간과 길드타운에서
제가 지금도 제가 진행한 것 중 최고의 캠페인이라고 생각하는 스타워즈 캠페인 후반기에는
1년 반에 걸쳐 서로 극적 감각을 조율해 왔고, 신뢰도 쌓였기에 나중에는 룰적 판정이랄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진행자인 제가 제시하는 상황에 참가자는 반응하고 저는 참가자 RP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지요.
마치 동의의 법칙을 잘 지키는 즉흥극처럼...
캠페인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세션에 저는 함선에서 탈출하는 일행에게 온갖 수난이란 수난은 다 주었습니다.
함선은 점점 폭발에 가까워오고, 구명정은 부족하고, 타고 도망치려던 배는 전투하느라 자리를 옮겼고...
그러나 어느 시점에도 참가자들은 저에게 왜 이렇게 상황을 힘들게 하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마스터, 우리 죽는단 말이에요 엉엉 하면서 구명정을 달라거나 탈출선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하지 않았죠.
그들은 그 하나하나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 대응하는 RP를 하며 끝없이 탈출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부족한 구명정은 패주하는 적병들에게 내주고, 락커에 있는 우주복을 입고 우주전투가 진행중인 우주공간으로 뛰어들었죠.
제가 PC들을 개죽음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절박하고 긴장감 있는 탈출 장면을 연출하려는 신뢰가 있었으니까요.
(혹은 PC 일행 죽였다가는 저를 때려눕힐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제시한 수많은 수난을 뛰어넘으면서 참가자들은 침착성과 자비심, 포스 능력을 보이며 탈출하는 RP를 선보였습니다.
탈출이 쉽고 편했더라면 아마도 장면의 재미와 PC의 영웅성 표현은 좀 덜했을 거라고 봅니다.
또 다른 캠페인인 길드타운 난민대책위 막바지에 참가자인 저에게 마스터인 백광열군은 꽤나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여기서는 상황의 성격상 직접적인 서술은 아닌, 그야말로 제안이었지만요.
포로로 잡힌 제 PC인 멜린윈이 성적으로 학대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역시 서로 신뢰가 없이는 남자 진행자가 여자 참가자에게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운 성격의 제안이었고,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광열군은 순전히 제안으로만 얘기하고 완전히 제 선택에 맡겨주었죠.
그리고 저는 혼쾌히 수락했습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얘기였고, 무엇보다 얘기가 재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니까요.
역시 멜린윈이 당한 일은 마음을 가누려는 멜린윈과 분노에 몸을 떠는 동료들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멜린윈이 동료 게렌에게 당신이 올 것을 믿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며 마음을 고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어떻게 나의 PC에게 그런 일을!! 하고 거부할 수도 있을 만한 얘기였지만, 그랬더라면 많은 극적 가능성을 놓쳤을 것입니다.
등장인물에게 위험한, 불행한, 싫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야말로 위에 말했듯 좋은 이야기의 원동력이니까요.
충분히 신뢰가 있다면, 그리고 이야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간다면
이렇듯 거부감이 들 만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거부감 속에는 좋은 이야기의 가능성이 숨어있으며,
안전한 영역, 예상한 진행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공동 서사인 RPG의 역동성을 극대화하니까요.
RPG와 친척처럼 닮은 즉흥극의 중요한 원칙, 이 동의의 법칙을 염두에 두면 RPG의 이야기는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더 많이 받아들이고 더 많이 신뢰하면서 더 위험하게, 더 즉흥적으로 놀면 더욱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好之者不如樂之者

아직까지 한번도 시나리오 끝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지라 일단은 재미보다는 플레이의 안정성을 찾고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