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팀에서 하고 있는 실피에나 캠페인입니다(http://sylfi.springnote.com/). 실피에나 모르시는 분들은 용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지지난 주 플레이를 전투 장면에서 시작했습니다. 유적충과의 전투를 통해 그놈들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을 장면의 목적으로 삼았지요. 유적충이 져서 도망가는 것을 추적하다가 그 본거지를 발견하는 장면을 다들 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전투 도중에 주사위가 괴상하게 나왔어요. 한 명은 다리가 삐고 다른 한 명은 칼이 부러지고 또 한 명은 화살통을 쏟고 --; PC 세 명이 전부 묘한 타이밍에 대실패가 나오는 바람에 한 명(제 캐릭터 "바스티온")은 의식을 잃고 다른 두 명도 거의 전투 불능의 경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전멸하여 캠페인을 마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사태를 어떻게 모면해 보고자 의논했습니다. 가능한 한 장면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요.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유적충들이 기절한 바스티온을 자기들 둥지로 납치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하게 다치기는 했지만 아직 의식이 있는 두 사람은 제 발로 걸어서 마을에 돌아가 구출 계획을 세운다는 쪽으로 얘기가 되었지요.

 

그러면 대체 유적충이 왜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데려갔는지 이유를 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운명회로에 영혼이 모자라, 사람들을 납치해 보충을 시작했다"고 설명하기로 했습니다. 유적 발굴 현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미친다는 설정이 책에 있는데, 그 이유는 운명회로에 영혼을 빼앗기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덧붙였지요. 그러다가, 그러면 바스티온이 그렇게 잡혀 온 첫 희생자인가 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주 전에 이미 설정된 사항 중에, 지금 PC들이 머무르고 있는 마을의 "신지기"(일종의 사제)는 전임 신지기가 강가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유적충에게 물 속으로 끌려들어간 덕분에 그 자리를 갓 이어 받은 초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 몫을 제대로 못하는 16세 소녀였어요. 그러면 전임 신지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유적충들에게 납치되어 유적 곁에 갇혀 있다가, 새로 잡혀 온 바스티온과 반쯤 미친 상태로 만난다고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거기서 지금 신지기가 제 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전임 신지기가 아직 죽지 않아서 그 신통을 이어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로 이어졌지요. (그리고 전임자가 죽으면 드디어 제 몫을 하게 된다거나.)

 

여튼 그래서 바스티온은 유적충의 소굴로 끌려가고, 다른 두 명의 PC들은 마을에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바스티온을 구하러 가야한다고 설득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 시점에서 마을 주민의 처지가 되어 보면, 정체 모를 흉칙한 벌레들에게 끌려 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게다가 이번의 전투에 PC 세 명만이 참가했던 이유가, 마을 사람들이 그 전번 전투에서 워낙 쓸모가 없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습니다(그것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당신들은 방해만 되고 도움이 안 되니, 전직 용병인 우리들한테 맡겨 두라는 거였죠.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자기들이 도움이 안 되니 오지 말라고 해 놓고는, 이제 와서 만신창이가 되어 도와달라고 하는 꼴이거든요. 게다가 PC들은 아무리 환영 받고 있다고는 해도 불과 얼마 전에 도착한 외지인이고요. 살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남을 위해 냉큼 목숨을 건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죠.

 

여튼 그래서 PC들의 도움 요청이 거절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보니 PC들과 마을 주민들의 관계도 변하게 되었는데... 그게 장기 계획에 비추어 보면 또 재미있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랬거든요:

 

1. PC들이 마을에 도착하여, 유적충을 물리치고 마을을 구한다.

2. 추수 직후 마을을 약탈하러 온 그 지방의 남작을 물리친다.

3. 실피에나에 도착한 루피나 일행과 만나 엘메리아로 떠난다.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틀어질 줄을 모르고 세운 계획이지요. 하지만 그 계획과 현 상황을 맞춰 보면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PC들이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유적충과 남작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는 지키기는 할 것인가), 마을에서의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스티온은 돌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PC 개개인의 심경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등등.

 

....

 

소시적에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생각해 보면 RPG 플레이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딜 가서 뭘 볼 것인지, 뭘 할 것인지는 떠나기 전에 대충 정해 놓지만, 실제로 현지에서 마주치는 일들은 정말 생각도 못한 것들이 꼬리를 물거든요.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